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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정조대왕의 삶)

정조의 꿈에서는 회원님들께 정조대왕의 생애에 관련하여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 드리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종은 친근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정조는 낯설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것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화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정조를 생각하며 효의 도시인 화성시를 설명할 때 시작점이 되며 빼 놓을 수 없는 정조대왕의 “효”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정조대왕(이하 정조)은 1752년생 입니다. 재위기간은 1776년~1800년으로 24년입니다. (지금이 2016년이니 240년 전의 이야기네요)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은 1776년 3월 10일에 경희궁 승정원에서 즉위한 청년국왕 정조의 말입니다. 왜 정조는 즉위한 첫날에 이 말을 했을까요? 사실 정조의 인생을 살펴보려면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할아버지인 조선21대임금인 영조까지 올라가보아야 합니다.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군주 두 사람을 들라고 하면 세종과 정조를 들 것입니다. 세종이 앞에서 끌어주고 정조가 뒤에서 밀어주어 왕조의 수명이 519년이나 지속되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조는 조선왕조 519년 동안에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고 83세까지 장수한 21대 왕입니다. 영조하면 떠오르는 것은 신문고, 균역법, 암행어사 박문수, 탕평책 등입니다. 매우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임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영조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조선후기의 정치적인 세력 중에서 노론세력이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격은 후에 그들이 가진 생각은 조선사회의 신분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노론세력이 양반사회를 주도해야 한다는 정치사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래 조선 초기에는 장남과 차남의 구별이 없고 여자들도 재산을 공평하게 물려받을 정도로 평등한 사회였는데 조선후기에 와서 신분제강화 등을 통해 거꾸로 되돌려 놓은 것 이 어찌 보면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대 임금 경종이 왕이 된 후 재위 4년 8개월 동안의 권력투쟁은 이후 사도세자와 정조 때 까지도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노론에 의해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고 결국 왕위에도 오른 영조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으로서 경종을 죽게 했다는 독살설에 평생을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한 콤플렉스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마저 직접 죽이게 됩니다.

영조는 세손인 정조만큼은 끝까지 보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1759년 15세의 나이에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려 왕비로 책봉된 정순왕후 김씨는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정조의 통치기간 내내 가장 큰 장애물이자 정적이었습니다. 노론 벽파세력인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홍인한 세력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임으로서 제 2의 영조를 만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 2의 영조는 정조겠지요.
그러나 정조는 삼종의 혈맥으로 생김새나 성격 등은 할아버지인 영조를 닮았으나 11세 때 본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야 할 길에 대한 준비를 착실하게 함으로서 노론 세력들에게 쉽게 당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버님 살려 주옵소서”

지금(2016년)으로부터 254년 전 영조 38년(1762년)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간(윤 5월 13일~21일) 갇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이때 영조의 나이 69세, 사도세자 28세, 정조의 나이는 11세였습니다.
당시의 윤 5월은 지금의 한 여름쯤 되니 좁은 뒤주 안에서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지켜본 당시 정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그 안타까움은 미루어 짐작을 해 볼 뿐입니다. 사도세자가 철들고 처음으로 부른 아버지가 뒤주(쌀독)속으로 들어갈 때 “아버님 살려 주옵소서” 라고 부른 것이라 합니다. 14년간이나 대리 청정했던 세자가 뜨거운 태양아래 신음하고 있던 상황에서 조정 대신들은 물론 처갓집의 장인(혜경궁 홍씨의 아버지)과 형제마저도 세자를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행위에 열중하였고 오직 세손(정조)만이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 주소서” 라며 빌었을 뿐입니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아버지입니다. 영조 11년(1735) 1월 21일 영조의 나이 마흔 둘에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자는 태어난 당일에 원자로 책보 되었으며 이름은 너그럽다는 뜻의 선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세자가 조선 22대 임금으로 영조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했죠.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모든 신하들이 축복한 세자였습니다. 영조는 효장세자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10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생모인 영빈이씨의 손에서 벗어나 보모의 손에서 왕위를 이을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됩니다.

자라나면서 사도세자는 무에 능한 모습을 보입니다. 조선후기의 왕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왕이 아니라 문왕의 기질입니다. 영조도 세자에게 문왕의 기질을 요구했지만 사도세자는 무의 기질이 더 많은 것 같아보였습니다. (물론 문의 등외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지배계층에서는 무는 일개 병사나 취급하는 정도로 무시했던 것 이 사실입니다. 또한 사도세자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소론과도 친분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러한 몇 가지의 이유만으로도 노론은 세자에게 불만을 갖게 됩니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도 불편했을 것입니다. 차츰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갈등이 쌓이게 되면서 노론세력 역시 다른 방향에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삼종의 혈맥 영조까지 본다면 사종의 혈맥은 사도세자 밖에 없었기에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노론세력으로서는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만약 다른 왕세자가 태어난다면. 노론은 영조의 후사와 관련해서 다른 정치일정을 짤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왕자는 나오지 않았고 공주만이 탄생될 뿐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나주벽서 사건이 나오게 됩니다. 영조 31년 (1755) 2월 나주 객사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는 내용의 흉서가 걸린 것 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30년 전 경종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고 이 사건은 탕평책으로 좋은 정치를 하고자 했던 영조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게 합니다. 영조는 세자를 직접 능지 처참장에 데리고 나가 윤지의 아들인 윤광철의 사지가 찢겨 나가는 것을 보게 했습니다. 스물 한 살의 세자는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이건 아니다! 세자는 경종독살설이 사실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소론 온건파 마져도 모조리 제거하려는 노론에 맞서 일부라도 보호하려는 세자, 어찌 보면 이때부터 노론에게 세자는 정치를 함께 할 친구에서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자가 왕이 되면 언젠가는 자신들의 가족들이 노비나 종으로 전락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또한 세자는 북벌도 주장했습니다. 무에 강한 세자, 영조 때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던 북벌, 조선의 마지막 군주였지요. 마침내 노론세력인 처갓집과 아내인 혜경궁 마져 등을 돌리게 됩니다. 어찌 보면 영조의 총애는 이미 사도세자가 아니라 세손인 정조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영조 38년 드디어 세자에게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세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나경언 이란 인물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철저한 계획이었지만 영조가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갖았더라면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는 10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닌 운명이 맺어준 사이였습니다. 영조와 생모 선희궁, 그리고 혜경궁 홍씨 역시 아버지를 따라 뼛속 깊은 노론의 골수 당인이었습니다. 유일하게(불행하게도) 사도세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조와 마찬가지로 남편인 사도세자는 죽음에서 동조하지만 아들인 정조는 왕실의 최고어른인 정순왕후 김씨와 대립을 하면서까지 지켜내게 됩니다.

자, 이제 정조입니다.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빈홍씨(이하 혜경궁)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산, 1759년 8세의 나이에 세손에 책봉됩니다.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책이나 강연을 들어보면 정조란 인물은 들여다볼수록 참으로 슬프다!, 드라마틱하다! 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정조의 어린 시절 큰 상처는 역시 1762년 직접 목격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입니다. 그날의 일을 기록하지 말라는 영조의 지침과 죄인의 아들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이미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호적까지 옮기면서 왕위 수업에 몰두하게 됩니다. 할아버지인 영조와 어머니인 혜경궁은 정조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죽음, 달리 생각하면 자신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죽은 것 이라고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만약 정조 자신이 없었다면.. 삼종의 혈맥이 왕위에 오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죠.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현실정치 속에서의 정조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었지만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세력이 극히 없는 상황에서는 옳은 말 한마디에도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론세력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 역사상 최장기 집권 52년의 기록을 세운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였을 때도 노론일당들이 정조를 3~4 차례나 시해하려고 할 정도로 말이지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정조는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냅니다.

자! 이제 그날이 왔습니다. 1776년 3월 10일 정조는 조선 제 22대 임금에 즉위합니다.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노론세력들은 경악을 했죠. 14년 전에 죽은 사도세자가 살아 돌아온 것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아직 힘은 약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조선의 청년국왕이었으니까요. 정조가 성군이라고 하는 이유는 정조의 두 번째 얘기에서입니다. 선대왕께서 종통을 둘로 나누지 말라고 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인 즉은 영조-효장세자-정조 정통라인을 따르겠다. 그러니 내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너희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라는 뜻입니다. 정조에게 있어 아버지의 복수는 하루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백성도 있었습니다. 정조는 노론세력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자 함께 정치를 할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한을 풀면서 할아버지가 추진해 온 탕평정책과 왕조중흥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신하를 능가하는 학문적 기초를 다진 정조는 무예와 문예 그리고 과학기술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고 성리학은 물론 남인의 실학과 노론 북학, 그리고 불교 등 당시의 온갖 사상과 지혜를 수렴하면서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구축해 갑니다.

즉위 6일 후 정조는 하루 두끼만 먹고 한끼를 먹을 때 반찬 세 가지만 먹겠다. 라고 말 합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그 말을 실천합니다.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전복이 해녀들이 물질을 해 고생하며 진상하는 음식이라는 애기를 들은 후 수라상에 전복이 오르지 않았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애피소드 하나 알려드리면 정조는 고기를 좋아했다는 자료가 없기에 식당을 준비하면서 고민 고민 하다가 샐러드 바를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언제 시작을 하였을까요? 할아버지인 영조의 3년 상을 마친 후 1778년 6월 첫 번째 조회에서 개혁을 선포하며 4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1.백성들의 재산을 풍요롭게 하겠다. 2.인재를 육성하겠다. 3.국방을 개혁하겠다. 4.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겠다. 정조는 이 네 가지를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정해놓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합니다.

백성의 재산을 풍요롭게 하겠다. 대표적인 것은 1791년의 신해통공입니다. 독점상업체제로부터 경쟁적인 시장경제로 경제정책의 축을 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모든 사람들이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수원화성이 보다 빠르게 도시로 발전하게 되기도 하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1392 조선 건국 이래 399년 동안 유지되었던 독점자본가의 권한을 정조가 없앤 것 이지요. 또한 정조 이전의 왕들은 훈민정음의 활용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정조 때에 들어서 많은 법률, 책, 정보 등을 훈민정음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줍니다. 어찌 보면 정조는 백성들에게 기존의 양반 등의 기득권층 에게 할 말은 하라고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궁궐 밖으로 행차를 할 때 왕의 얼굴을 보게 된 것도 정조 때에 이르러 된 것이라 합니다.

인재를 육성하겠다. “큰 집을 짓기 위해선 큰 재목이 필요하다” 즉위 직후에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여 자신을 헌신적으로 뒷받침해줄 신진기예들을 등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서얼허통정책을 통하여 유능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게 됩니다. 정조의 바로 옆에는 거대한 정치 집단인 노론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겨루려면 집권 초기에 국왕의 지지 세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 등 많은 문신들이 배출되었으며 이러한 세력들로 하여금 개혁적인 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국방을 개혁하고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겠다. 정조는 기존의 군대를 대폭 축소하고 장용영이란 왕의 친위부대를 만들어냅니다. 당시의 군대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군대가 아니고 어찌 보면 노론세력을 위한 군대였습니다. 쓸모없는 장수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입니다. 장용영은 30명으로 출발하여 후에는 18,000명까지 그 숫자가 늘어나게 됩니다. 정조는 여러 군대들을 통페합 해서 국방비를 대폭 축소하고 그 자금으로 국가의 재정 또한 안정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새는 양쪽의 날개로 날아간다는 말처럼 장용영으로는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저항을 무마시키는 한편, 규장각으로는 국왕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각종 개혁안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정조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와 군대를 모두 쥐고 흔들던 노론세력들 속에서 정조는 문과 무를 정비해나가고 그것을 통해 조선을 개혁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은 22대 임금이었으나 죄인의 아들로서 세력은 아주 약했습니다. 이날의 조회 이후에 정조는 10여 년간 치밀하게 왕권을 다지게 됩니다. 규장각과 장용영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노론세력과도 함께 정치를 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정조는 결정은 아주 신중하게 하지만 일단 결정이 된 일은 신속하게 해 치우는 성격의 군주였습니다. 정조 13년(1789년) 7월 정치에 힘이 붙자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하기로 합니다. 그해 10월 4일 사도세자의 영구가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향했습니다. 정조는 더 슬프게 곡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구를 파보니 광중에 물이 거의 한자 남짓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8일간 물 한 모금 먹지 못하여 돌아가셨는데 지난 세월동안 아버지의 시신이 물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니 더 슬프게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제 드디어 사도세자가 자신의 아들인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길입니다. 27년 전 뒤주에 갇히던 날 “아버님 살려 주소서” 하고 빌었던 그 아버지와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 주소서” 라고 호소하며 이제는 이 나라의 임금이 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는 것입니다. 사도세자 묘의 이장지는 수원 용복면에 있는 화산, 현재의 융건릉입니다. 묘소의 이름도 영우원에서 왕실의 무궁한 융성을 기원하는 뜻의 현륭원으로 고쳤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사도세자가 세자로 대리청정을 하던 영조36년(1760년) 7월19일 처음으로 영조의 품을 떠나 홀로 대신들을 이끌고 건강문제로 온양온천으로 휴양을 떠나는 길에 수원에서 유숙을 할 때 수원부 북쪽에 있는 어느 산에 올라 두루 둘러보고 좋은 곳이라고 감탄하다가 처소로 돌아왔는데 그곳이 바로 화산 이었습니다.

정조는 능을 이전하면서 많은 부분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 중에서 많은 신경을 쓴 부분이 화산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이주대책 문제였습니다. 당시에 수원부사 조심태가 팔달산아래의 땅이 큰 고을을 조성하기에 적당하다는 말을 듣고 화산에 살던 백성들을 팔달산아래의 넓은 평야에 이주시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도시 개발계획이 시행된 것이지요.

이때 정조는 사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전에 벌써 화성 건설을 염두에 두고 능을 옮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 개국 초의 태조가 권문세족들의 세력기반인 개성을 버리고 신흥 사대부의 새로운 결집을 목표로 옮긴 수도 한양이 이제 정조의 정적인 노론의 세력 기반이 되어 있었습니다. 노론의 수도인 한양에서 임금은 명목적인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정치란 것도 어찌 보면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에게 새로운 도시가 필요했을 것이고, 지금의 서울은 아버지가 비명으로 죽은 곳입니다. 어찌 보면 정조의 고민은 즉위 초부터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 누구보다 외가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정조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책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어머니 혜경궁 이라는 점 이었습니다. 아무리 잘라내도 외가라는 원죄의 끈이 정조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상황, 쉽게 말해 아버지의 복수를 단행하면 어머니가 울고 그 어머니를 위로하면 지하에 있는 아버지가 우는 형국이었습니다. 국법을 따르자니 어머니가 울고 어머니를 따르자니 국법이 우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혜경궁이 쓴 한중록이 현시대에 다시금 재평가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비참하게 죽게 한 정치의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 잠복되어 있는 곳입니다.

정조에게는 새로운 정치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담자! 정조는 화성이라는 새 푸대에 새로운 정치를 담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가 서울이 아닌 제 3의 도시 즉 화성을 건설한 이유일 것입니다. 화성이라는 이름의 유래에서도 정조가 왜 화성을 건설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화인축성이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화라는 지방에 봉해진 관리가 요임금에게 수와 부 그리고 다남을 기원하자 요임금은 수는 욕됨이 많고, 부는 일이 많으며, 다남은 걱정이 많아서 싫다.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 까닭이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화성이라는 이름에서 정조가 보여 주고자한 것은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장수와 부귀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오. 왕의 입장에서는 요임금처럼 덕을 펴는 도시라는 두 가지의 함축된 말입니다.

화성은 1794년에 쌓기 시작하여 1796년 화성성곽을 완성 합니다. 수원시의 노력으로 1997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됩니다. 2년 9개월(33개월) 이란 짧은 공사기간으로 지어진 화성은 5.74km정도입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지 않고 돈을 주어 사기를 높이고 일을 시킴으로 10년의 공사를 33개월의 짧은 시기로 성곽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화성은 서쪽에 산을 등지고 너른 들이 펼쳐진 곳에 있습니다. 높고 낮은 지형을 이용하여 구불구불 이어지며 안팍으로 달라지는 주변 풍경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100미터마다 세워진 방어시설은 어는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뛰어난 건축물은 그 시대 예술과 문화의 열매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시기 역시 조선의 역사에서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던 시기였습니다. 수원화성을 설계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학자 정약용입니다. 성곽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22가지의 업종에 종사하는 1,840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왜 이러한 중요한 공사를 성을 쌓아본 적도 없고 전쟁도 격어보지 못한 31살의 새내기 문인에게 맡겼을까요? 아마도 정조는 아주 새로운 성, 획기적인 성곽을 만들려면 경험은 없지만 새로운 과학기술을 많이 접한 실학에 관심이 많은 학자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정조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 행사인 1795년 을묘년에 그 유명한 8일 간의 을묘원행을 합니다. 6000명이 동원된 이 행사는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이 목적이었지만 사실은 그 동안 철저하게 준비해온 정조의 가장 큰 정치 행사였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하고,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기위해 과거시험을,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외영 군사들에게 사기를 높여주면서 화성에서 제일 높은 서장대에 올라 전시도 아닌데 황금 갑옷을 입고 노론세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완벽한 방어와 공격시설을 갖춘 화성에서 직접 지휘관으로 군사훈련을 총 지휘하였던 것입니다. 재위기간 쌓은 업적을 과시하면서 백성들과 신료들에게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거대한 정치적인 행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의 화성은 어떻습니까? 연쇄살인사건의 도시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방에 놀러가도, 외국여행을 할 때도 화성시에서 왔다는 애기를 꺼리게 됩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우리는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의 세대에서 실체도 확실하지 않은 연쇄살인사건 이미지가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원님들과 이런 변화를 함께하길 바라고 그 일환으로 지역의 정신인 정조를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조가 진실로 하고자 했던 정치는 임금과 백성이 직접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정치였을 것입니다. 후에 만천명월주인옹 이란 호를 쓰면서 자신은 모든 하천을 비추는 달빛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라고 말 합니다. 신하들을 구름에 비유하면서 임금과 백성사이에 구름이 끼지 않는 것이 좋은 정치 라고 생각했으나 임금도 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론들은 정조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조는 그의 꿈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심복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고 종기라는 하찮다면 하찮은 증세로 진찰을 받기 시작한지 보름여만인 1800년 6월28일 숨을 거두게 됩니다. 남인들 사이에서는 정조가 독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1800년 정조 24년 5월 30일 마지막이 된 신하들과의 자리에서 정조는 오늘의 하교는 참다가 나온 것이라며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는 노론세력들을 척결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신하들은 침묵으로 일관, 이로서 정조와 노론 신하들의 마지막 결별이 시작됩니다. 정조의 승부수는 마지막에도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0년 전 아버지 사도세자의 잉여가 걸어갔던 그 길로 정조의 잉여가 운구 되었습니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아 아버지 사도세자를 뵐 면목이 없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평소 사도세자 곁에 묻히고 싶다던 꿈만을 이룬 채 말 없이 아버님의 곁으로 갈 뿐이었습니다.

정조가 죽은 후 노론세력들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모두 부정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세도정치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여 100년 후 망하게 됩니다. 정조는 을묘원행 후 세자가 15세가 되고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1804년에 어머니와 화성에 내려와서 살겠다고 합니다. 순조가 정치를 잘 할 수 있도록 상왕으로서 뒤에서 지켜주면서 진행하는 개혁정치를 마무리하여 조선을 변화시 키는 마지막 꿈을 이루려고 했을 것입니다. 만약 정조가 5년만 더 살았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조선의 미래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정조의 꿈은 우리 것을 바탕으로 선진 외래문명을 수용하여 주체적인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300년을 주기로 르네상스를 경험했습니다. 15세기 세종의 시대, 18세기 정조의 시대가 우리 조상들의 몫이었다면, 21세기의 르네상스는 바로 우리 시대의 몫일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역사란 승자의 기록” 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 내용 중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참고서적으로는 정치가 정조(박현모), 사도세자의 고백(이덕일), 사도세자가 꿈꾼나라(이덕일) 정조의 화성행차 그8일(한영우), 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과 김준혁 한신대 교수님의 영상 강의를 참고하였습니다.

하루 시간이 한가하실 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화성 8경 나들이를 떠나 보세요.

감사합니다.